‘홀리 모터스(Holy Motors, 2012)’는 프랑스 감독 레오 카락스의 귀환작이자, 21세기 영화예술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다룬 실험영화입니다. 영화는 하나의 명확한 서사를 따르지 않으며, 주인공 오스카가 리무진을 타고 하루 동안 다양한 인물로 분장하며 ‘연기’를 수행하는 구조를 갖습니다. 이는 단순한 직업의 묘사가 아니라, 영화 속 삶과 실제 삶, 연기와 실재, 이미지와 본질 사이의 경계를 흔들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 속 각 에피소드는 극도로 상이한 장르와 톤을 지니며, 카락스는 이 파편적 구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정체성을 해부합니다. ‘홀리 모터스’는 관객에게 스토리를 따라가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각 시퀀스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상징과 감정, 메타포 속에서 길을 잃을 용기를 요구합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해체적 서사 구조, ‘오스카’라는 존재가 상징하는 연기의 정체성, 그리고 카락스가 구축한 형식 실험의 의미를 중심으로 ‘홀리 모터스’를 심층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해체된 서사 구조와 ‘에피소드’의 의미
‘홀리 모터스’는 전통적인 기승전결 서사나 인과적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속적인 ‘불연속’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을 취하며, 각 시퀀스는 서로 장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갖습니다. 주인공 오스카는 하루 동안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는 노숙자가 되었다가, 액션 히어로가 되며, 죽음을 연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가족의 아버지로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개별적으로는 완결성을 가지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플롯으로 엮이지 않습니다. 이는 곧 관객이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해체하고, 영화라는 장르가 기대하는 ‘일관성’을 철저히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파편화된 구성은 무작위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영화라는 매체가 ‘삶을 흉내 내는 방식’을 탐구하는 메타적 접근입니다. 각 에피소드는 인간의 삶에서 특정 감정, 사회적 역할, 혹은 문화적 클리셰를 드러내는 축소판으로 기능하며, 관객은 이 단편들을 통해 현대인의 분열된 정체성과 현대 미디어 환경의 파편성을 체감하게 됩니다. 레오 카락스는 이를 통해 “더 이상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카메라는 무엇을 기록하는가?”, “관객은 왜 이 장면을 보려 하는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이러한 물음은 해체된 서사 구조 속에서 더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오스카라는 인물: 연기와 존재 사이
주인공 오스카는 단일한 인격체가 아닙니다. 그는 극 중에서 끊임없이 다른 인물로 ‘연기’하며, 그 모든 역할이 끝나도 여전히 본래의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이처럼 불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놓여 있으며, 이는 곧 ‘배우’라는 존재,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한 은유로 확장됩니다. 오스카가 맡는 역할들은 전통적인 인물과 사건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매체가 요구하는 상징적 캐릭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CG 슈트와 함께 파리 지하에서 괴이한 액션을 펼치는 장면은 영화 산업의 기술적 진화를, 머리카락을 자르며 죽음을 연기하는 장면은 존재의 끝을 암시하며, 코미디나 가족극의 클리셰를 패러디한 장면은 오스카 자신이 ‘소비되는 이미지’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연기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존재의 조건 그 자체가 됩니다. 오스카는 점점 자신의 연기가 끝없는 퍼포먼스임을 자각하고, 그 자체가 삶이라는 역설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누가 보는지도 모르는 연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레오 카락스는 이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연기하고 있는가?” 이는 단지 배우나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정체성—특히 디지털 시대의 자기연출적 삶—을 통찰하는 질문입니다. 결국 오스카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며, 각자의 사회적 역할과 자아를 번갈아 수행하며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집합적 상징입니다.
형식 실험과 시네마에 대한 시네마
‘홀리 모터스’는 본질적으로 영화에 대한 영화, 즉 메타 시네마입니다. 이 작품은 장르적 실험, 시각적 스타일, 편집, 사운드, 상징 등 모든 영화적 요소를 사용하여 ‘영화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탐색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장르의 무절제한 전복입니다. 뮤지컬, 누아르, SF, 슬랩스틱, 멜로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가 극도로 혼합되며, 이는 관객에게 친숙한 문법을 계속해서 붕괴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특히 파리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시퀀스는 도시 자체가 스크린이자 무대가 되는 방식으로 촬영되어, ‘현실 속 연기’라는 주제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영화는 고전 필름 시대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기도 하며, 디지털 전환 이후 관객의 시선과 영화 제작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컨대 영화 초반, 관객들이 잠든 극장, 빈 좌석, 무표정한 얼굴들은 영화가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하는 매체’가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합니다. 또한, 등장하는 리무진은 ‘영화’라는 매체를 이동시키는 운반체이자, 장면과 장면 사이를 연결하는 상징적 장치로 활용되며, 영화가 자체적으로 이동하고 분열되는 방식을 형상화합니다. 레오 카락스는 이 작품에서 영화의 본질을 해부하면서도, 여전히 영화라는 형식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담아냅니다. ‘홀리 모터스’는 단지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영화란 무엇인지, 왜 여전히 우리가 영화를 보는지를 되묻는 진지한 성찰이자 시네마에 바치는 불온하고도 아름다운 러브레터입니다.
‘홀리 모터스’는 난해하고 불친절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복잡성 속에는 현대 예술이 직면한 본질적인 질문들이 녹아 있습니다. 삶과 연기, 정체성과 이미지, 영화와 현실 사이의 끝없는 변주를 통해, 레오 카락스는 관객에게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 있음을 역설합니다. 파편적이고 실험적인 형식은 단지 도전이 아닌, 영화라는 예술의 미래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식입니다. ‘홀리 모터스’는 영화를 해체하면서도 영화다움을 되찾으려는 시도이며, 우리 모두가 각자의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